00:00천금같은 아들이 응급실에서 생사를 오가며 50번의 수술을 받던 시간, 아버지의 마음은 무너져 내렸습니다.
00:10배우 이덕화 씨가 돌아가신 아버지 원로배우 이해춘 씨에 대한 애틋한 그리움을 드러낸 겁니다.
00:17서정민 변호사, 아버지가 나 때문에 쇄약해져서 돌아가시게 됐다고 아픔을 고백하신 거예요.
00:23네, 그렇습니다. 배우 이덕화 씨가 어제 방송된 한 예능에서 20대 시절 오토바이 사고로 인해서 생사를 넘나들었던 그런 경험을 이야기를 했습니다.
00:331977년 25살 때, 그러니까 한국의 제임스 딘이다라고 불리면서 거침없이 인기를 구가하던 시절이었습니다.
00:4110톤짜리 만원 버스에 이덕화 씨가 타고 있던 오토바이가 깔려 들어가서 60m를 끌려가는 그런 큰 사고가 발생했습니다.
00:49얼마나 참목했는지, 당시에 청바지를 입고 있었는데 허리띠만 남았다고 하고, 또 가죽 재킷도 입고 있었는데 몸만 남을 정도로 상당히 큰 사고였다고 합니다.
00:59이 사고로 인해서 50번 넘는 수술도 받고, 또 장을 1m 이상 절제도 했다고 합니다.
01:06이때 동료들이 문병을 왔었는데 얼마나 상태가 심각했던지 문병을 왔다가 미리 조의금을 걷고 문념을 할 정도였다고 해요.
01:14그런데 또 하나의 다른 문제, 당시 이덕화 배우의 아버지, 이해춘 배우의 몸 상태도 좋지가 않았다는 겁니다.
01:21이미 그전에도 혈압으로 쓰러져서 휴양을 하면서 조금씩 그나마 몸이 좀 좋아지고 있던 시점이었는데,
01:28아들이 이런 큰 사고를 당하는 바람에 충격을 받고 그래서 일찍 돌아가셨다는 거죠.
01:33돌아가실 때는 이덕화 배우의 바로 또 옆방에서 돌아가셨다고 하면서 판단을 했습니다.
01:38그러니까 아버지가 앓고 계셨던 그 병이 호전이 됐다가 큰 충격을 받고 세상을 떠나게 되셨을 만큼
01:45어떻게 보면 당시 이덕화 씨의 상태는요, 굉장히 위중했습니다.
01:49난 교통장에 죽었었어, 자기가. 자기들은 잘 모르지.
01:57정말 들어가서 오늘내로 한다고 그러고 중환자실에 14일 만에 깨어났어.
02:05그러니까 매일 같이 집에 식구들과 가면 오늘이 고입니다, 오늘이 고입니다.
02:09그래서 14일 만에 깨어난다.
02:12그리고 3년 병원에 있다가.
02:14그래서 나는 그 가운 입은 사람들한테 엄청난 존경심인 사람이야.
02:18아들의 생사를 넘나드는 그 고비 앞에서는 약해지실 수밖에 없었던 겁니다.
02:35그런데 이해추 선생님 얘기를 조금 하면 김은수 변론과 굉장히 강렬한 카리스마를 가진 그런 역할들을 많이 해오셨잖아요.
02:42그렇습니다. 특히 1950년대에서 70년대 우리 영화의 황금기라고 불리우던 시절.
02:48그때는 외화에 대비되는 이름으로 방화, 나라방자를 써서 우리 영화를 방화라고 불렀었거든요.
02:55그때 얼마나 다작이 됐었던지 아침에 유명 배우들은 다른 영화를 찍다가 오후에는 또 다른 영화에 촬영해 참여하는 등 이런 일화들이 있었는데요.
03:04특히 고 이해추 씨의 경우에는 악역 전문 배우였습니다.
03:09그래서 대한민국 최고의 빌런이라는 별명으로도 불렸었고요.
03:13당시에는 악역이라는 표현보다는 성격 배우다 이렇게 많이 불리우기도 했었습니다.
03:18300편이 넘는 영화에 촬영했는데 악역이 아니었던 영화는 딱 두 편 뿐이었다고 해요.
03:23그래서 사실 당시에는 학생들이 교복을 입고 단체 관람을 하는 경우가 있었는데
03:28만약에 아버지가 나오는 작품이면 그 영화는 좀 가지 말라고 말리는 경우도 있었다고 해요.
03:34보통 탐구한 오리, 간신배, 난폭한 이런 역할을 주로 맡았었다는 그런 후일담이 전해지기도 했습니다.
03:41그렇군요. 이렇게 강한 아버지가 사실 그대로 또 쓰러지게 되셨으니 아들도 얼마나 가슴이 아팠을까 싶습니다.
03:49아들은요. 아직도 그 고통을 차마 짐작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03:55사고가 난 버스가 10톤. 그리고 이덕하 씨가 타고 있던 오토바이가 400kg인데
04:00그 400kg 오토바이가 10톤 버스 아래로 이렇게 깔려 들어간 겁니다.
04:05우리가 흔히 오늘 내일 한다고 그러죠.
04:07정말 죽는 날 받아놓고 있는 그런 상황에 어머니는 계속 울고 계시고
04:11아버지는 좀 병안이 습관이 계셨는데
04:14본인도 모르게 소변을 보실 정도로 아들의 그 모습에, 끔찍한 모습에 충격을 받으셨대요.
04:23그리고 또 이해춘 선생님이 돌아가신 그때 연세가 예순이 채 되지 않은 연세였다고 알려지고 있어요.
04:29그렇다 보니까 아들은 좀 더더욱 그리움에 사붙일 수밖에 없어요.
04:32그렇습니다. 이해춘 씨는 아들 이덕하 씨 사고 이후에 1년 정도 동안
04:38자신의 병도 잊은 채 아들 병관호와 사고 수습에 몰두했습니다.
04:431년 정도 지난 후에 이덕하 씨의 병세가 호전되기 시작할 무렵에는
04:47함께 입원해 있던 아버지 이해춘 씨가 갑자기 홍수 상태에 빠져서
04:51향년 58세로 세상을 떠나게 된 겁니다.
04:55유서 한 장 남기지 못했다라고 하는데요.
04:57이덕하 씨는 아버지 빈소에서 차마 절도 못했다라고 하면서
05:02당시에 몸이 걸을 수조차 없는 상태였기 때문에
05:05아버지께 마지막 절도 못 드렸다. 이렇게 눈시울은 불켰습니다.
05:10그랬더니 이덕하 씨가 어느덧 아버지 그 연세를 한참 넘어서게 되셨어요.
05:15누구나 아시겠지만 이덕하 씨는 또 굉장히 소문난 낚시광이시죠.
05:19그래서 전국 활도를 안 돌아본 낚시터가 없다고 하는데
05:22아직 딱 한 곳 못 가는 곳이 있다고 해요?
05:25그게 좀 사연이 있습니다.
05:27바로 아버지가 별세하시기 전에 요양을 하신 곳이
05:31강원도 화천에 있는 8호 인근이었다고 해요.
05:34그래서 이덕하 씨가 사고 나기 전에
05:36쉬는 날마다 음식을 싸서 아버지를 찾아 뵈었었는데
05:39평상시에 굉장히 어마하고 무뚝뚝했던 이 아버지가
05:43실은 마음속으로는 아들이 오는 날이면
05:45미리부터 모시적삼에 풀을 먹이고
05:48흰 고무신을 파랗게 닦아놓을 정도로 준비를 하셨었다고 해요.
05:52그러나 막상 또 얼굴을 마주치면 별일 없냐 이런 대화밖에 없었다고 회상하기도 했습니다.
05:58그리고 본인이 낚시를 하던 중이면
06:01정말 그 성취하는 팔로 배를 노를 저어가지고 커피를 가져다 주시기까지 했다고 해요.
06:08그러니까 이런 추억이 있기 때문에 아버지가 작고하신 후 40년이 흘렀는데도
06:12아직까지는 차마 그 8호 후에는 가보질 못했다고 합니다.
06:16사실 이덕화 씨 인터뷰를 찾아보니까
06:18그 아버지에게 한 대 맞으면 대청마루까지 날아갈 정도로
06:22굉장히 좀 엄격했다라고 또 기억을 하시곤 했어요.
06:25그런데 한편으로는 이 얘기 들어보니까
06:27사랑도 참 많이 받으셨다라는 생각이 들어요.
06:30그래서 그런지 본인도 이제 본인의 아이들한테 꼭 해주겠다면서
06:33다짐한 원칙이 있다고 해요.
06:35네, 그렇습니다.
06:36굳게 마음먹은 게 딱 하나 있었다라고 하는데
06:39아이들 운동에는 절대 빠지지 않겠다라는 그런 다짐이었습니다.
06:43운동에.
06:43이제 이덕화 배우에는 아들 그리고 딸이 5년 터울로
06:47또 같은 국민학교를 다녔다고 합니다.
06:49그래서 11년 동안 계속해서 한 번도 안 빠지고 운동에 참석을 했다라는 거죠.
06:54같이 있던 아들 역시도 그 말이 맞다 한 번도 빠지지 않고 오셨다면서
06:58이덕화 씨가 이런 다짐을 꼭 지켰다라고 인증하기도 했습니다.
07:02그렇군요.
07:02그리움이 또 진하게 남은 아버지와 아들 이야기 한번 살펴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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