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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1시간 전


"하늘에서 별을 따다"…하늘로 간 'CM송 레전드'
윤석화의 도전…한국 연극사 기록 쓴 '신의 아그네스'
윤석화, 뇌종양 수술 뒤 투병 사실 공개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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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00서글픈 이별 소식이 참 많은 연말입니다.
00:04한국 연극계의 데모 배우 윤석화씨가 오늘 오전 향년 69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00:11그 낭량하고 또 재기발랄하던 특유의 목소리가 아직도 귀에 선한데 말이죠.
00:30사실 저 중에 단 한 가지라도 안 들어보신 분이 없으실 겁니다.
00:55생전에 천 편의 CM송을 불렀다고 하시니 어지간한 광고 음악은 사실 다 윤석화씨한테 갔던 셈이에요.
01:04제일 기억에 남으시는 곡 있어요?
01:05일단 윤석화 배우가 이 문화활동, 연애 생활을 CM송 가수로 출발을 한 거거든요.
01:12그래서 어렸을 때 좀 더 20살 때 불렀던 목소리는 굉장히 낭낭한데 사실은 또 굉장히 허스키한 보이스로도 많이 알려져 있습니다.
01:21저 같은 경우에는 역시 윤석화씨도 저랑 똑같은 취향이더라고요.
01:25하늘에서 별을 따다.
01:26그 바로 땡땡씨 청량음료 노래를 본인도 지금 들리는 저 노래를 본인이 가장 마음에 드는 곡이라고 뽑았었거든요.
01:36저도 같은 생각입니다.
01:38윤석화씨가 이렇게 얘기했어요.
01:39원래는 학교 선생님이나 의사나 혹은 헌모양처가 되고 싶었다.
01:46이렇게 말했지만 어쩌다가 CM송을 부르게 됐는데 껌이면 껌, 제가면 제가 아이스크림까지 안 부른 CM송이 없었다면서 과거에 어떻게 데뷔하게 됐는지를 밝히기도 했습니다.
01:59이렇게 20살 신예를 스타로 만들고 또 기어이 연극의 길로 인도를 했던 게 바로 광고 음악입니다.
02:09그런데 그 전에도 이 사람은 좀 남다르다 이렇게 이미 알아보신 분이 있었다고요.
02:15그렇습니다.
02:16바로 가수 조영남씨입니다.
02:18이 사연이 있는데 윤석화씨가 당시 급란 요구에 재학을 하고 있었거든요.
02:24그런데 그때 당시에 옆에 이화역으로 보니까 음악회에 김세환이니 사활과 오월이니 이런 연예인을 초대하는 걸 보고
02:31우리가 못할 게 뭐야 이렇게 좀 오기가 생겼다고 합니다.
02:34그래서 당시 조영남씨가 군대에 있었는데 조영남씨를 섭외를 했고요.
02:39그때 조영남씨가 이후에 이야기를 하기를 이 급란 요구의 간 부분에 대해서는 기억을 하는데
02:44뭐 때문에 갔는지는 기억은 안 나지만 그때 당시에 윤석화씨가 고1 정도 되는 체격이었는데
02:49전교생을 아우르는 걸 보고는 얘 뭐가 돼도 되겠다 이렇게 생각을 했다고 합니다.
02:55아니 그러니까 전교생을 들었다 놨다 했던 당찬 요구생이었던 겁니다.
03:00자 이렇게 그런데 CM송을 부르러 간 곳에서도 눈에 띄어서 배우가 또 발탁이 되셨다고 해요.
03:08그 과정에서는 시련이 조금 만만치 않았다 이런 얘기가 들립니다.
03:12그렇습니다. 윤석화씨는 사실 빵 하고 떴죠.
03:15그러니까 사실은 나오면서부터 엄청난 인기를 누렸던 분이에요.
03:18그런데 당시에 처음 떴을 당시만 해도요.
03:21여러 가지 논란도 좀 있었습니다.
03:23제가 말한 논란이라는 평론가들은요.
03:26이 윤석화씨가 갖고 있는 허스키한 보이스 있잖아요.
03:28지금은 그게 개성으로 잘 인정받고 있는데
03:31예전에는 허스키한 보이스가 평단에 혹독한 평을 받았다고 합니다.
03:361975년에 꿀맛으로 배우 인생을 시작하고 승승장구했지만
03:40한쪽에서는 발성이 잘 안 된다, 연기가 과장됐다 이런 비판들이 좀 있었고요.
03:46그래서 당시에는 이게 흉이 돼서 상당히 좀 마음이 상했던 것 같아요.
03:50그래서 윤석화씨가 뭐라고 그랬냐면
03:52나처럼 평론가에게 두들겨 맞은 사람은 없을 거다.
03:56한 번도 칭찬을 받은 적이 없다 이렇게 얘기하고 있고요.
04:00그리고 더 잘하라는 채찍질이었지만 때론 너무 아팠다.
04:04나도 칭찬을 듣고 싶었다 이런 얘기를 한 걸 보면
04:06당시에 이 개성이 당시에는 흉이 됐다고 볼 수 있을 것 같은데
04:10다만 이제 당시에 또 어떤 비평도 있었냐면
04:13연극 배우가 전에는 별로 그렇게 큰 스타들이 없었거든요.
04:17그런데 윤석화씨가 스타가 되면서 나와서 많은 사람의 사랑을 받으니까
04:22관객이 많다는 이유로 상업주의로 또 몰렸다고 합니다.
04:26이런 아픔들이 있었지만 그래도 윤석화씨는 본인의 특유의 목소리뿐만 아니라
04:30연기력으로 사랑을 받았습니다.
04:32하지만 이런 시련을 이기게 했던 거는요.
04:37연극에 대한 사랑 그리고 또 관객에 대한 책임감이었습니다.
04:42반세기가 흐른 지금 윤석화씨의 목소리는 이렇게 하나의 장르가 됐죠.
04:47어디서 왔을까
04:56그 눈을 펼쳐
05:00아름다운 너는
05:05어디서
05:07내게
05:11왔을까
05:16그렇도록
05:21아름다운 꽃이
05:23이렇게 빨리 시달려야
05:25나는 늘 죽어났어
05:27고비는 있었지만
05:32그래도 생에 정말 참 많은 분들의 사랑을 받으셨어요.
05:36특히 본인이 미국에서부터 대본을 직접 들고 와서
05:40주연까지 맡았던 이 작품
05:42신의 아그네스
05:43당시에 찾아보니까 관객이 무려 10만 명이나 몰렸어요.
05:47그렇습니다.
05:48뉴욕에 머물던 그 83년에 방학을 틈타서 왔다라고 하거든요.
05:52그때 직접 대본을 들고 와서 신의 아그네스를 주연을 했었는데
05:57정말 깨지지 않은 기록인 게 532회 공연을 했는데 전석이 매진이었고요.
06:03그리고 무려 10만 관객이 그때 당시에 몰릴 정도로 한국 연극사에서는 신기록을 기록했었다고 합니다.
06:09그때 당시에 윤석화 씨가 20대였는데
06:11그 부모에는 순수하고도 강기어린 연기에 객석이 열광을 했다라고 하고 있고요.
06:17그때 당시에 불황에 허덕이고 있는 그 연극계가 이 작품 덕분에 새로운 돌파구를 찾았다.
06:22그런 평가를 받기도 했었습니다.
06:24이후에도 참 숱한 명작들을 거쳐갔지만
06:28한국 연극사의 일대의 파란을 일으켰던 신의 아그네스는요.
06:34윤석화 씨 본인에게도 잊을 수 없는 작품이 됐습니다.
06:39무대는 저에게는 제가 가장 사랑하는 진실된 땅이에요.
06:46무대에 서 있는 순간만큼은 진실되지 않으면 아무것도 기댈 데가 없는 거예요.
06:53어쩔 수 없이 신의 아그네스로 제가 여러분에게 알려지게 됐고
07:01아니요. 그렇지 않아요.
07:03난 여기 이렇게 있잖아요.
07:04만약에 실수로 태어났다면 어떻게 내가 여기 이렇게 있을 수가 있어요.
07:15그야말로 사회적으로도 엄청난 센세이션을 일으켰고
07:20이렇게 스타가 됐지만요.
07:26또 편한 길만 가시지는 않으셨어요.
07:28보면 공연예술 전문지도 만드셨고요.
07:31소극장도 운영을 하셨었고요.
07:34그러다가 3년 전쯤이었던가요.
07:36이제 갑작스럽게 투병 소식이 전해졌어요.
07:38맞습니다. 저는 윤석화 배우의 저 열정적인 무대 모습뿐만 아니라
07:42앵커가 조금 전 언급했던 객석이라는 공연예술 문화 잡지도 만들었고요.
07:46그다음에 정미소라고 해서 소극장을 만들면서 단순히 본인이 배우에 그치지 않고
07:51이 문화 산업을 키우기 위해서도 굉장히 노력했다는 점을 꼭 강조를 드리고 싶었고요.
07:57지금 2023년에 인터뷰하시는 윤석화 배우 모습을 보실 수가 있는데
08:04보면 2022년에 햄릿 연극을 마치고 영국 출장지로 갔는데
08:10그때 갑자기 영국에서 쓰러졌습니다.
08:14그래서 당시 현지 병원 의견을 듣고
08:16런던에서 진짜 에어 앰뷸런스 타고 서울로 돌아와서
08:20빠르게 수술을 받았는데 그때 뇌종양 수술을 받게 된 겁니다.
08:24그 직전에도 징후가 있었다고 해요.
08:26왼쪽 팔이 좀 안 움직인다거나 그런 징후들이 있었는데
08:31결국 쓰러지면서 수술을 받게 된 것이고요.
08:35이 사실이 알려진 게
08:36이제 2023년에 서울에서 열린 한 연극 토카타에서 5분 정도 우정 출연을 했었는데
08:42그때 이제 본인이 투병하고 있는 사실을 밝힌 겁니다.
08:47그러셨군요.
08:48이렇게 손 쓸 수도 없이 찾아온 병마.
08:51윤석화 씨는요.
08:52이런 고통을 털어놨습니다.
08:54그리고 또 많은 이들의 안타까움을 자아냈고요.
09:00제 앞니가 다 나가버린 거예요.
09:04그러니까 이게 사람이 아니지 뭐.
09:07저는 이런 것도 있어요.
09:09부럽죠?
09:13이렇게 주스를 마셔요.
09:16새벽 한 5시든 6시든 간호사들이 그냥 들어와서
09:21무작위로 여기다 혈관 주사를 맞고 자요.
09:23그런데 그게 저한테 얼마나 아픈지
09:26새벽마다 제가 괴성으로 시작을 하는 거예요.
09:30내가 살면 얼마나 살겠다고
09:32이렇게 막 아침마다 괴성을 지르면서
09:35누군가를 미워하면서
09:37어떤 때는 정말 그분들이 너무너무 막 미우니까
09:42제가 두 발 당수가 나갈 것 같아요.
09:48그런데 항암 치료를 중단을 또 하셨어요.
09:51당시에 다들 놀랐었던 기억이 나요.
09:54그렇습니다.
09:55당시에 죽음을 대면할 시점임을 깨달았는지
09:57윤석화 씨가 담대한 결정을 내렸습니다.
10:00바로 의사한테 본인을 퇴원을 해달라 이렇게 설득을 했던 건데
10:03그때 당시 주치의 강석구 박사가
10:05연극 아가씨와 건달들을 8번이나 볼 정도로
10:09윤석화 씨의 개인적인 팬이었다고 합니다.
10:12그래서 윤석화 씨가 이 주치의한테 가서
10:133개월을 살든 6개월을 살든 중요하지 않고
10:16하루를 살아도 괜찮으니까
10:18윤석화답게 살다가 윤석화답게 죽게 도와달라
10:21이렇게 하면서 설득을 했고요.
10:23그래서 그 이후에는 자연 치료를 받기로
10:26결정을 했었다고 합니다.
10:28이후에 주변인들이 항암을 제기하라
10:30이렇게 권유가 많기도 했지만
10:31그녀는 절대 후회를 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10:34참 심정을 짐작하기도 어렵습니다.
10:37어쨌든 이게 본인에게든 가족에게든
10:40쉬운 결정은 아니잖아요.
10:41당연히 그렇죠.
10:42저런 결정을 한다는 게 어떻게 쉬운 결정이겠습니까?
10:45가족 입장에서는 더더욱 그러지 않았을까
10:46라는 생각이 개인적으로 들고요.
10:48그러나 윤석화 씨는 마지막까지
10:50윤석화답게 살다 간다
10:52이런 표현을 쓰고 있습니다.
10:54왜냐하면 힘겨운 투병 생활 중에도요.
10:57일주일에 한 번은 무조건 공연장에 가서
10:593시간 공연을 본다고 해요.
11:02이유는 그래야 다시 무대에 설 수 있다는 생각이었다.
11:05그리고 스스로 싸우고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다.
11:08이런 말을 한 걸 보면
11:09연기에 대한 열정이 투병 중에도
11:12계속되고 있었다는 생각이 들고요.
11:13그리고 복귀에 대한 강한 의지를 보였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11:16실제로 2023년 연극 토카타에
11:19휠체어를 타고 우정 출연했던 짧은 순간
11:21그 순간이 관객들이 기억하는 무대에서의
11:25그의 모습이었습니다.
11:27단 한 번이라도 나를 기다리는 사람들을 위해서
11:30다시 목소리를 내는 것
11:32마지막까지 간절히 바랬던
11:35윤석화 씨의 소원이었습니다.
11:50뭔가 한 번 짠 해주길 바라는
11:53제 관객들에게
11:55죽기 전에 한 번 짠 해주고 싶은 거죠.
12:00내가 한 구조만 해볼까?
12:01아리랑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12:06아리랑 고개로 넘어가고
12:07네번 간다
12:11아리랑 아라리오 아리랑 고개로 넘어간다
12:34고인의 열정과 또 그리고 연극에 대한 애정 잊지 않겠습니다
12:44삶과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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