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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일 전


배우 故 김지미 영면…지난 7일 美 현지서 '별세'
영화인총연합회 측 "평소 심폐소생술 원치 않아"
영화인총연합회 측 "약물 치료했으나 극복 못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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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00한국의 엘리자베스 테일러 배우 김지미씨가 별세했다는 소식입니다.
00:30김지미씨가 별세했다는 소식입니다.
01:00배우라는 게 자기관리도 중요하고 주변 통솔도 잘해야 되고 안 작품 끝내놓을 때가 나는 제일 행복했어요.
01:10완성을 해놨으니까 감사하죠.
01:14그분들이 아니었으면 내가 오늘이 있지가 않죠.
01:17가족보다도 더 소중할 수도 있어요.
01:226년 전 인터뷰를 한번 여러분과 함께 만나봤습니다.
01:2585세를 일기로 별세한 배우 김지미씨는 미국에서 세상을 등지었는데요.
01:35홍정선 기자님.
01:36저희 뉴스타팬 방송 전에 직접 취재한 걸로 알고 있는데
01:39그런데 이미 영화인들이 영화인 장으로 준비하려고 했었는데
01:43미국에서 화장 절차까지 마쳤다면서요.
01:45그렇습니다.
01:481957년에 고등학교 시절의 영화 황혼열차, 이 황혼열차가 김기현 감독, 한여의 김기현 감독이 연출을 한 거고요.
01:57당시에 굉장히 유명했던 배우 박암, 도군봉이 나오고
02:00안성기씨가 5살 때 이 어린이 배우로 출연했던 영화인데
02:03이걸 시작으로 해서 마지막 영화 이장호 감독과 함께한 명자 아끼꼬 쏘냐.
02:09이게 1992년입니다.
02:11명자는 김지미씨의 본명이고요.
02:13그런 35년 동안 무려 700여 편의 영화에 출연을 하면서 700여 인물의 인생을 사셨습니다.
02:21이런 분 당연히 한국 영화인 총연합회든 한국 배우협회든 당연히 영화인 장으로 치르려고 나섰죠.
02:28그런데 당초에는 10일 별세다 이렇게 알려졌는데
02:32다시 마지막 영화를 함께했던 이장호 감독이 알아보니 지난 7일에 별세를 하셨고
02:39그리고 그래서 미국에서 이미 다 화장이 완료됐고
02:43또 그냥 가족이 조용히 영면에 드시게 하고 싶습니다라는 유족의 뜻에 따라서
02:49한국에 와서 다시 영화인 장으로 치르거나 이런 상황은 없을 것 같습니다.
02:54그런 상황인데 사인은 정확하게 알려진 건 아닌데
02:59이장호 감독이 알기에도 평상시에 이렇게 큰 지병이 있고 그런 건 아니었다고 해요.
03:05그런데 이웃의 집에 놀러 갔다가 거기서 쓰러졌고
03:09그 쓰러진 부분을 저혈압 쇼크사라고 하는 거고요.
03:13평상시에 굉장히 주장이 강하시고 해서
03:16연명치료 이런 걸 거부하기 때문에
03:19그대로 이제 의식 회복하지 못한 상황이 별세까지 이어진 그런 상황으로 전해들었습니다.
03:26그러니까 이제 홍 기자께서 직접 취재하신 바로는
03:29미국에서 현지에서 화장을 했고
03:31가족들도 이제 다시 장례를 하거나 더 크게
03:34그 영화인 장이든 뭐든 그걸 원치 않기 때문에
03:37일단 이렇게 해서 별세 소식이 미국에서 알려진 거고
03:41현지에서 화장을 했다.
03:43영화인들도 유족들의 뜻을 존중하기도 했다.
03:461957년에 영화계에 데뷔했습니다.
03:51그 유명한 김기영 감독의 황원열차로 데뷔했고
03:55제작사와 영화 행정가로도 발표했습니다.
03:58무려 지금으로는 상상할 수도 없는데
04:01700여 편의 작품에 출연한
04:04정말 대배우 김지미 씨입니다.
04:06다음 화면을 볼게요.
04:07사실은 김지미 씨 하면 연기도 연기지만 사랑도 남달랐다.
04:17과거를 좀 더 소환하고 추억해야 되기 때문에
04:20여기 네 분 중에 나이로 보나 몰라보나
04:23가장 근접한 최승평론가에게 질문을 드릴게요.
04:26왜냐하면 김지미 씨가 연기도 연기지만
04:29더더욱 대중들에게 김지민이라는 이름 석자가 각인이 됐던 건
04:34바로 정말 파란만장했던 결혼 생활과 연애 인생이었던 것 같아요.
04:38그렇죠. 사실 1960년대에서부터 지금까지 우리 사회가 겪은
04:43근현대 사이 격동기를 보면
04:441960년대에서부터 80년대까지는 사실상 보수화된
04:48남성 중심의 어떤 그런 시각과 문화가 지배하던 때였어요.
04:52그런데 저렇게 이제 영화계에서 독보적인 존재감을 알리던
04:55영화 배우가 신여성처럼 자유부인 같은
04:59그런 이제 정말 사회적 어떤 충격을 주는
05:02그런 사안들이 바로 이제 자유부인 같은 그런 행각을 보였기 때문이죠.
05:06첫 결혼사에 이르러서 또 유명한 배우였던
05:08최 무령과의 두 번째 결혼.
05:10그다음에 가수 나훈아의 사실혼 관계.
05:12그다음에 마지막 의사와의 모친을 돌봐주던 의사와의 결혼에 이르기까지
05:16그렇게 좀 자유분방한 여성의 삶을 주체적으로 살았던 점에 대해서
05:20사회적으로는 비난의 목소리도 좀 있었지만
05:23그나마 그렇지만 결국에는 사회 주류의 목소리가
05:25우리도 이러한 것들이 문화의 트렌드 혹은 우리 삶이 받아들여야 하는
05:29어떤 근대화에서 현대화로 넘어가는
05:31격동기의 단계로 받아들여지면서
05:33김재미 씨는 사실 어찌 보면 약간 당시
05:36신여성의 상징 같은 그런 또 모습을 보여준 적이 있었습니다.
05:39시대를 앞서가는 판무파탈 이런 거였습니다.
05:41판무파탈의 이미지는 요즘과의 얘기지만
05:43과거에는 그런 개념은 없었지만
05:45그럼에도 불구하고 선도했던 그런 어떤 신여성의 모습을 보여줬던 측면에서
05:50김재미 씨가 영화인으로서 싸워둔 족정만큼
05:53우리 사회 문화 현상에 어떤 영향을 끼쳤던 점도
05:56상당 부분 저는 순기능으로 남아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06:00저도 그 세대를 한 시대를 산 건 아니지만
06:03최무룡 씨와 나훈아 씨를 모르지는 않거든요.
06:07그만큼 당대를 풍미했던 가수와 배우와
06:11연애와 결혼.
06:15그런데 다음 화면을 볼게요.
06:18그런데 실제로 홍정성 기자님
06:20당시 최무룡 씨와의 스캔들은
06:24간통죄, 유치장 이게 세간에 어마어마한 파장을 주었었어요.
06:29그럴 수밖에 없는 게
06:32일단 최무룡 씨는 12년 선배 배우고요.
06:36그 아내인 강효실 씨도 배우였어요.
06:38말하자면 선배 배우의 남편이었던 거죠.
06:41그렇게 해서 함께 유치장을 갔는데
06:45그 감옥에서 나오고
06:46또 이제 최무룡 씨가 이혼을 하고
06:49위자료를 주고 다시 최무룡 씨와 결혼하는 과정에서
06:52김지민 씨가 본인의 집을 팔아서
06:55이제 말하자면 강효실 씨에게 그 돈을
06:57위자료를 주고 결혼을 했거든요.
06:59그러니까 최민수 씨의 모친인 거잖아요.
07:00네, 그렇습니다.
07:01그런데 저는 제가 부산영화제에서
07:03김지민 씨를 만났던 일이 있는데
07:05그 말씀을 드리고 싶어요.
07:08그것이 뭐냐 하면
07:09우리가 흔히 한국의 엘리자베스 테일러다 해서
07:11엘리자베스 테일러 8번 결혼
07:13김지민 4번 결혼 이것만 비교를 하는데
07:16사실은 두 배우 모두 공이
07:18누구도 따라올 수 없는 아름다운 미모를 가졌고
07:21또 굉장한 카리스마가 있는 연기가 가능했던 배우입니다.
07:25그런데 김지민 씨하고 또 엘리자베스 테일러가
07:29똑같이 한 말이 있어요.
07:30뭐냐면 나에게 연애는 없다.
07:33나는 사랑하면 결혼하는 거다.
07:35그래서 남보기에 한국 사회에서
07:374번을 결혼했기 때문에
07:38뭐 이게 굉장히 많이 했다라고 하는데
07:41연애 4번 정도 해본 사람 나만 있냐.
07:46이게 김지민 씨 말이었는데
07:48사실은 엘리자베스 테일러도
07:50나도 역시 나는 사랑하면 결혼했다.
07:52이렇게 얘기했고
07:537남자와 8번의 결혼을 했죠.
07:56그러니까 무슨 얘기냐면
07:57김지민 씨가
07:58처음에 만약에 채무룡 씨 같은 경우에도
08:01불륜으로 시작했지만 결혼으로 이어졌고
08:03엘리자베스 테일러도
08:04만약에 불륜으로 시작했어도 꼭 결혼을 했습니다.
08:07이제 외국 배우의 말이니까 그대로 전해드리면
08:10나는 말하자면 연애했던 남자와 남자가
08:14잠자리를 했던 남자가 남편이 아닌 적이 없다.
08:17이런 얘기를 했는데
08:17저희가 너무 결혼 횟수로 이렇게 얘기하는 건 아닌가
08:21제 개인적 의견입니다만
08:22저는 판무파탈이라기보다는
08:24자신의 선택, 자신의 연애, 자신의 사랑에 당당했던
08:28그런 어떤 신녀성의 표본이었다.
08:30제 개인적으로는 이렇게 얘기하고 싶습니다.
08:33최민수 씨도 상황을 그대로 받아들였고
08:35김지민 씨를 어머니라고 부른다고 했는데
08:37사진 하나를 한번 짧게 볼까요?
08:40이게 한 99년이었나요?
08:44동아일보가 취재했던 저 사진
08:46아버지 최무룡 씨의 빈소에 찾아온
08:51지금 고인이 된 김지민 씨의 사진까지
08:54두 사람의 표정 포착, 참 슬픔에 잠긴 모습도
08:59이게 벌써 20년이 넘었습니다.
09:03아까 저희가 여러 추억하는 과정에
09:06연기도 사랑도 정말 뜨거웠던 배우다
09:08한국의 엘리자베스 테일러
09:10여러 가지 얘기를 두 분이 하셨는데요.
09:12허주연 변호사님
09:13보니까 아까 부산국제영화제에서
09:16당당하게 걸어나오는 김지민 씨의 모습도 있고
09:19배우 자체 말고도 제작자 혹은 영화 행정과
09:23연기를 접고서라도 꽤 많은
09:27정말 음악의 여왕당 활동을 폈더라고요.
09:30김지민 배우께서 정말 걸크러쉬라는
09:34캐릭터를 어떻게 보면 우리나라 영화사에서
09:37가장 먼저 선보인 연예인이 아니었을까라는
09:40생각이 드는 것이 아름다운 외모와
09:42타고난 연기력으로도 인정을 받았지만
09:45사업가로서 영화 제작사를 설립하고
09:48지미필름이라는 제작사를 설립하고
09:50영화 7편 제작했거든요.
09:52티켓, 길소뜸 이런 영화들 제작을 하면서
09:55우리 한국 영화사에 큰 족적을 남겼습니다.
09:58그러면서 어떤 사업 수환으로서
10:00사업가의 면모도 유감없이 드러낸 데다가
10:02또 영화 행정가로서도 활동을 한 것이
10:06지금 영화 관련해서 영화인협회 이사장도 지내고
10:09영화진흥위원회 위원도 지내면서
10:12우리나라 한국 영화계의 발전을 위해서도
10:15계속해서 노력해온 분이거든요.
10:17그러다 보니까 사실 60년대에 데뷔를 해서
10:19아름다운 외모와 연기력으로만
10:22배우로, 아름다운 배우로 남을 수도 있었지만
10:2480년대까지 전성기를 누리면서 계속해서 활동을 했고
10:28그 이후에도 이렇게 오랫동안
10:30우리나라의 어떤 영화사의 음막의 여왕이라는
10:33타이틀이 가장 걸맞는 배우로서 남을 수 있었던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10:36특히 지금 1960년대는 한국 영화계의 르네상스 같은 시기였잖아요.
10:40이때 찍었던 영화들이 하루에도 몇십 편씩 겹쳐 찍기를 할 정도로
10:45그래서 본인도 어떤 영화에 다 출연했는지
10:47기억도 못할 정도로 많은 영화를 찍었거든요.
10:50700편을 촬영했습니다.
10:52이걸 우리가 어떻게 출산할 수 있냐면
10:542017년에 김지미 배우께서 본인 스스로
10:57내가 700개가 넘는 인생을 살아봤으니까
10:59후회가 없다라고 얘기를 했거든요.
11:01그러니까 적어도 본인이 기억하는 영화 편수만
11:03700여 편이라는 거잖아요.
11:05배우로서도 제작자로서도 그리고 영화인으로서도
11:08그야말로 우리에게 어떤 카리스마 있는 모습을 보여주면서
11:14계속해서 진화해온 인물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11:17과거 영화배우로서 활약했을 때 모습
11:20저희가 영상을 많이 준비했는데
11:21미국에서 별세한 배우 김지미 씨
11:25본인의 명복을 빌겠습니다.
11:28파리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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