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0현재 논란인 안상호와 정반대기를 걸었던 조선인 의사, 지난 11일 한 온라인 커뮤니티에 올려진 게시물 제목입니다.
00:08이 글은 최근 이슈가 된 배우 하영의 증조부 안상호처럼 관비 유학생 출신 의사였던 김익남의 생애를 비교 소개해 화제가 됐습니다.
00:17최근 안상호의 친일 논란이 재점화되면서 그와 마찬가지로 구한말 정부의 지원을 받아 일본에서 근대의학을 전공했으나 전혀 다른 삶을 살았던 김익남의 행보가
00:28다시금 조명받고 있습니다.
00:3034일 대한제국 시기 민족지대한메신보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이정은 연구위원회 최초의 근대개업의 안상호의 생애와 활동 논문 등에 따르면
00:39안상호는 1898년 대한제국관비 유학생으로 일본 도쿄 GKN 의학교에서 공부한 뒤 일본 의사면허를 취득해 현지에서 의료활동을 했습니다.
00:50이후 1907년 귀국해 한국인 최초로 서양식 병원을 개원했으며 고종의 왕실 진료에도 참여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00:57그러나 안상호는 1916년 결성된 친일단체 대정친목회의 평위원 명단에 이름을 올리는 등 친일행적 의혹을 받고 있습니다.
01:07대정친목회는 대표적 친일파인 이완용이 고문을 맡았으며 조선총독부의 내선용화 정책에 적극 동조했던 단체로 평가받습니다.
01:15일제 강점기 언론 보도 역시 이러한 의혹을 뒷받침합니다.
01:191918년 12월 12일자 매일신보에는 안상호가 일본인 아내와 결혼한 뒤 나는 일본 사람과 똑같다.
01:26지금 조선옷은 한 볼도 없고 매운 음식도 못 먹는다라고 언급한 내용이 일선동체의 모범 사례로 소개됐습니다.
01:33이에 증손여인 배우 하영은 지난 12일 개인사회관계망 서비스를 통해 관련 자료를 직접 찾아보는 과정에서 증조부의 친일적 행적을 알게 됐다며 과오를
01:43무겁게 받아들이며 후손으로서 진심으로 사죄드린다고 고개를 숙였습니다.
01:47다만 학계 일각에서는 신중론도 제기됩니다.
01:51안상호의 이름이 친일임명사전에 등재되어 있지 않으며 역사적 단죄 대상에 해당하는지에 대한 학술적 검토와 연구가 아직 충분히 이뤄지지 않았다는 이유에서입니다.
02:01이처럼 안상호의 행적을 둘러싼 논란이 불거지면서 삶의 궤적이 뚜렷이 달랐던 김잉남이 재조명받고 있습니다.
02:09같은 관비 유학생 출신이지만 졸업 이후 조국을 대하는 두 사람의 행보가 극명하게 대조되기 때문입니다.
02:15김잉남은 안상호보다 3년 앞서 gk의원의학교를 졸업한 선배입니다.
02:20두 사람은 우리나라 최초의 관립근대의학 교육기관인 의학교의 교관 임명 요청을 대하는 태도에서부터 갈라섰습니다.
02:27김잉남은 1899년 7월 gk의원의학교를 졸업한 뒤 대한제국 정부로부터 의학교 교관으로 취임하라는 요청을 받자 1900년 8월 귀국해 교관으로 취임했습니다.
02:38그는 4년 동안 의학교 교관으로 재직하며 총 32명의 한국인 근대의사를 배출했습니다.
02:44대한제국의 국권이 심각하게 위협받던 시기에 근대의학 교육을 받은 최초의 의사집단을 양성했다는 점에서 한국 근대의학사에 뚜렷한 업적을 남겼습니다.
02:54김잉남은 4년 후 국가의 요구로 대한제국 육군군의장으로 전임한 뒤에도 의료계와 군진의학 분야에서 왕성하게 활동했습니다.
03:031908년에는 일본인 의사단체인 개림의학회에 대항해 우리나라 최초 의사단체인 의사연구회를 창립해 초대회장을 맡기도 했습니다.
03:11김잉남 후임 의학교 교관으로 임명된 사람이 바로 안상호였습니다.
03:15하지만 안상호는 1904년 10월 교관으로 임명됐음에도 귀국을 거부했다가 석 달 뒤 해임됐습니다.
03:22안상호는 1907년 의학교가 일제통감부에 의해 대한의원에 강제통합된 이후에야 귀국했습니다.
03:29김잉남이 일제와 거리를 두다 불이익을 받은 정황은 여러 자료에서 확인됩니다.
03:34그는 1907년 6월 이토 히오붐이 암살을 시도했다가 실패한 뒤 자결한 정재홍 의사의 추모사업에 참여했습니다.
03:41이로 인해 일제로부터 불이익을 받았고 일제가 한국 의료계를 통제하기 위해 발급했던 공식 의사 면허증인 의술개업인 허장을 끝내 받지 못했습니다.
03:51황상익 서울대 의과대학 명예교수는 이를 김잉남이 일제에 포섭되거나 협력하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결정적 단서로 평가했습니다.
04:00황교수는 의료계와 교육계, 군진의학 분야에서 요직을 거친 김잉남은 일제가 적극적으로 포섭하려 했을 가능성이 매우 높은 인물이라며
04:08그런데도 일제에 협력한 흔적은 찾아볼 수 없다고 밝혔습니다.
04:11이처럼 뛰어난 업적에도 김잉남의 생애가 널리 알려지지 않았던 까닭은 그가 기반을 두었던 의학교 역사와 관련이 깊습니다.
04:18황교수는 대한제국이 자주적으로 설립한 의학교는 국권 상실과 함께 8년 만에 폐지된 이후 그 역사와 의미가 제대로 평가받지 못했다며
04:28김잉남 역시 국가가 사라지면서 자신이 활동했던 제도적 기반을 잃은 것이라고 설명했습니다.
04:34김잉남의 생애는 2000년대 들어 연구자들의 지속적인 자료 발굴을 통해 비로소 본격적으로 조명받기 시작했습니다.
04:412015년 서울 종로구의 의학교 터표석이 들어섰고 2018년에는 서울대 의과대학 연권 캠퍼스 내 김잉남 동상이 세워졌습니다.
04:49황교수는 최근 논란이 역설적으로 한국 근대의학사에서 매우 중요한 인물을 다시 돌아보는 계기가 됐다며
04:56이번 계기를 통해 그동안 제대로 조명받지 못했던 김잉남 선생과 의학교의 역사적 가치가 널리 알려지기를 바란다고 당부했습니다.
05:04자막 제공 및 광고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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