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렇게 우리는 또 한 분의 할머님을 가슴 아프게 보내고 말았습니다.
1926년 강원도 평창에서 3년 중 장녀로 태어난 김 할머니는 일찍이 부모를 여의었습니다.
친척 집에서 생활하던 할머니는, 열일곱, 꽃다운 나이에 중국 지린성 훈춘 위안소로 끌려갔습니다.
3년 동안 일본군의 '성 노예'로 살며 갖은 고초를 겪었습니다.
7번이나 자살을 시도했을 정도로 끔찍했고, 탈출을 꿈꿀 때마다 구타가 따라왔습니다.
평생 왼쪽 귀를 쓰지 못하는 후유증도 겪어야만 했습니다.
[故 김군자 할머니 /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 귀가, 고막이 터져서 말도 못 듣고, 우리는 이 몸속에 얼마나 칼자국이 있는지 아세요? 그래도 죽지 않고 살았으니까 여기 있는데….]
광복이 되고 나서야 고향으로 돌아올 수 있었던 김군자 할머니.
하지만 약혼자를 비롯해 사랑하는 사람들을 떠나보내야 했고, 98년에 나눔의 집에 들어와 여생을 보내셨습니다.
떠올리고 싶지 않은 기억이었지만, 일본군의 야만성만큼은 꼭 알리고 싶었던 할머니.
할머니는 2007년, 미 하원에서 끔찍했던 과거를 생생히 증언하며 전 세계에 일본군 위안부의 참상을 알렸습니다.
이 증언은 위안부가 '20세기 최대 인신매매 가운데 하나'라는 내용을 담은 '위안부 결의문' 채택을 이끈 일등 공신이 됐습니다.
할머니는 기부천사로도 통했습니다.
위안부로서의 설움보다 배우지 못한 설움이 더 크다며 아름다운재단의 제1호 기금 출연자가 되기도 했는데요.
차곡차곡 모은 전 재산은 당신의 장례비 500만 원만 남겨놓고, 오롯이 이웃에 나누어주셨습니다.
한 많은 생의 마지막 길은 나눔의 집에서 같이 생활했던 친구, 박옥선, 이용수 할머님이 지켰습니다.
다른 할머니들은 거동이 불편해 노제에 참석하지 못했습니다.
할머니가 이루지 못한 마지막 꿈.
일본 정부의 공식 사과였습니다.
할머니는 마지막까지 위안부 문제를 가슴에 품으셨다 합니다.
[이용수 할머니 /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 좀 기운이 없어 보여요. 그래서 기운내라고 하니까 "해결 되겠나" 이러더라고요. 그래서 "응, 해결되지. 될 기미가 있으니까 열심히 먹는 것 챙겨 먹고…."]
국가인권위원회는 오늘 성명을 내고, 한국과 일본 정부에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의 인권 보호를 위해 적극적인 조치를 하라고 촉구했습니다.
또, 지난 2015년 12월 한국과 일... (중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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